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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 초원에 나무들로 둘러싸인 전통 유르트, 칸국 시대를 상징하는 풍경.
📜 역사

칸국 시대의 카자흐스탄 역사

칸국 시대의 카자흐스탄 역사: 중앙아시아의 문화적 전성기와 왕조 시대를 돌아보며 칸국 시대의 카자흐스탄 역사는 술탄 자(Zha)가

칸국 시대 카자흐스탄의 역사: 중앙아시아의 문화적 번영과 역대 왕조 시대를 돌아보다

칸국 시대 카자흐스탄의 역사는 1460년 자니베크와 케레이 술탄이 우즈베크 울루스 칸의 가혹한 통치에 반발해 자신들의 아울(유목민 촌락)을 이끌고 시르다리야 스텝을 떠나면서 시작됩니다. 그들은 1460년 제티수로 이주하여 1465년 모굴리스탄 군주 에센 부카의 영토에서 카자흐 칸국을 건국했습니다.

우즈베크 울루스의 칸이 사망한 후, 카자흐인들은 시르다리야 강안으로 돌아와 그의 추종 세력을 몰아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카자흐 칸국의 군주들은 동부 데슈트 키프차크의 부족들을 휘하에 결집하는 데 성공하였고, 이들의 협력 속에 남쪽 마와라안나흐르의 샤이바니 왕조 및 서쪽의 노가이 오르다와의 항쟁을 거쳐 국가의 국경을 이르티시강에서 자이크강까지 넓혔습니다. 이후 카자흐인들은 제티수의 모굴인들을 복속시켰으며, 자니베크와 케레이 술탄의 추종자들은 사리아르카 스텝을 노가이 오르다로부터 방어해 냈습니다.

타우케 칸의 치세 동안 카자흐 칸국에서는 법전 '제티 자르그'가 제정되었습니다. 이 법전의 제정자들은 저명한 공직자이자 학자, 철학자였던 톨레 비, 카즈베크 비, 아이테케 비였습니다.

1718년 카자흐 칸국은 준가르의 압박으로 해체되었으나, 모굴인들로부터 물려받은 세 개의 오르다(주즈)인 대주즈, 중주즈, 그리고 소주즈로 나뉜 영토 분할 체제는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다음 국가 간의 전쟁: 카자흐스탄 및 준가르는 17세기 전반에 시작되었습니다. 준가르인들은 카자흐스탄 영토로 침입하며 두 가지 목표를 추구했습니다. 바로 생활권의 확장과 정복지에서 거두는 야삭(Yasak)세를 통한 국고 충당이었습니다.

카자흐 땅에 대한 적들의 침략은 1756년까지 이어졌습니다. 1723~1727년은 카자흐-준가르 분쟁 중 가장 가혹했던 시기로, 훗날 '악타반 슈브른드(대재앙의 세월)'라 불리게 됩니다.

1723년부터 1727년 사이에 준가르는 투르키스탄과 타슈켄트 도시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 시기 침략자들을 피해 피난길에 오른 수많은 빈민들은 집을 떠나 우즈베크 땅에서 새로운 삶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카자흐 전사들이 전투력과 경험 면에서 준가르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는 점은 주목할 만합니다. 그러나 준가르군은 스웨덴인 요한 구스타프 레나트의 지휘 아래 포로가 된 러시아 총기 제작자들이 만든 화기를 훨씬 더 많이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방어 측은 적과 달리 상비군을 보유하지 못했고, 대개 각 주즈(부족 연맹)가 특정 원정을 위해서만 군대를 소집했습니다. 이러한 요인들은 전투 행위의 기간과 성격에 자연스럽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적의 군사력에도 불구하고 카자흐 전사들은 여러 전투에서 준가르 군대에 막대한 타격을 입힐 수 있었습니다. 1643년, 장기르 술탄의 군대와 잘란토스 바투르가 이끄는 대주즈 민병대는 준가르 알라타우 산자락에서 열린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역사서에서 이 전투는 '오르불락 전투'로 기록되었습니다. 이후 1654~1657년 쿤타이지 셍게의 군대에 맞선 제4차 전쟁 기간 동안 카자흐인들은 제티수로 복귀했습니다. 1729년 12월부터 1730년 1월 사이에는 카자흐 민병대가 안라카이 산악 지대에서 준가르 군대와 맞서 싸웠습니다(안라카이 전투).

카자흐-준가르 대결의 역사에서 아야고즈강, 아리스강, 불란티강에서 벌어진 전투 역시 특별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이 전투들에서 카자흐 칸국의 군사들은 독창적인 전술적 특성을 십분 발휘하여 적을 지치게 만들고 퇴각하도록 강제했습니다.

외부의 지원 없이는 침략자들과 싸우는 것이 매년 더 큰 난관이 될 것임을 깨달은 소주즈(Zhuz)의 아불하이라 칸은 1730년, 준가르에 맞서는 군사 동맹 결성을 제안하고자 러시아의 안나 이바노브나 여제에게 사절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여제는 이 제안을 지지하지 않았고, 그 대신 러시아의 보호국 지위를 제안했습니다.

카자흐 칸국 외에도 당시 준가르 역시 제정 러시아와 전쟁 상태에 있었으며, 이는 사실상 오랜 지역 분쟁의 종식을 의미했습니다. 1756년 만주 청나라 군대가 마침내 준가르 칸국을 격파했습니다. 살아남은 이들은 준가르인들은 추격자들을 피해 칼미크 칸국으로 피신했습니다.

Das 청 제국은 한때 준가르의 영토였던 땅에 신장성을 설치했습니다(1761년). 청나라는 제티수 지역에도 관심을 보였으나, 과거 카자흐와 러시아 간에 맺은 협정이 작용하여 '천조(天朝)'의 황제는 이 지역에 대한 야망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1731년 10월 10일은 카자흐스탄의 러시아 편입 과정이 시작된 날입니다. 이미 언급했듯이 카자흐 측에서 이 조치를 주도한 인물은 대주즈(오르다)의 아불하이라 칸이었습니다.

Anders als bei der 소주즈(오르다)와 달리, 대주즈 및 중주즈(오르다)의 러시아 편입 과정은 오랜 세월에 걸쳐 진행되었습니다. 공식적으로는 대주즈(오르다)가 1734년 6월 10일 러시아 신민권을 부여받았으며, 이는 당시 안나 이바노브나 여제의 칙령으로 확인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러시아 국경으로부터의 거리와 코칸트와의 인접성으로 인해 이 과정은 심각한 난항을 겪었습니다. 이에 따라 1818년 대주즈는 다시 한번 러시아 신민으로 받아들여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1824년 5월, 알렉산드르 1세 황제는 아울(유목 촌락)을 이끌고 제티수로 이동한 대주즈(오르다)의 14명의 술탄에게 러시아 신민 자격을 부여하는 문서에 서명했습니다. 이후 15년에 걸쳐 주즈(오르다)의 나머지 구성원들도 러시아에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1830년, 동포들의 발자취를 따라 중부 주즈(중간 호르드)의 여러 공동체 통치자들 역시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고자 하는 뜻을 표명했습니다.

카자흐 칸국이 러시아 제국의 일부가 되면서 얻은 혜택은 무엇이었을까요? 우선 러시아 정부는 새로운 영토를 수호하기 위해 합병된 지역의 안보를 확보하는 일련의 조치를 단행했습니다. 칸국의 영토를 통과하는 무역로들은 국제적인 위상을 얻게 되었습니다. 도로와 공장, 생산 설비를 건설하기 위한 투자가 카자흐스탄으로 유입되기 시작했고, 양국 간의 통상 및 경제 관계는 새로운 도약의 전기를 맞이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러시아 편입은 여러 부정적인 결과를 낳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카자흐 부족들의 삶이 크게 뒤바뀌었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유목민이 전통적인 삶의 방식을 바꾸어야만 했습니다. 새 정부의 무분별한 농업 정책으로 인해 방목 및 축산 분야에서 심각한 위기가 닥쳤습니다. 요새와 군사 시설의 건설로 인해 카자흐인들은 가장 비옥한 목초지의 상당 부분을 빼앗겼으며, 원주민의 출입이 금지된 이른바 '금지 구역'이 생겨났습니다. 게다가 1822년에는 '시베리아 키르기스 규정'이 반포되어 카자흐스탄 내 칸의 통치 권력이 공식 폐지되었습니다.

이러한 부정적인 변화들은 당연하게도 카자흐 사회 전반에 깊은 불만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훗날 민족 해방 봉기로 이어졌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농민 전쟁(푸가초프 반란, 1773~1775년), 시림 다토프의 영도 아래 일어난 소부 주즈(소호르드) 카자흐인들의 반봉건·반식민 민족 운동(1783~1797년), 서카자흐스탄 빈민 봉기(1836~1838년, 지도자 이사타이 타이마노프 및 마함베트 우테미소프), 잔코자 누르무하메도프의 카잘린스 봉기(1856년) 등이 있습니다.

20세기 첫 10년 동안 스톨리핀 농업 개혁의 결과로 러시아 중부에서 약 50만 호의 농가가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하면서 민중의 분노는 극에 달했습니다. 이들에게는 이전에 원주민이 소유하고 있던 이미 개간된 토지 1,700만 데샤티나 이상이 배분되었습니다. ⇒ 소비에트 연방 시절의 카자흐스탄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