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루크 미르자: 중앙아시아 통치자의 생애와 유산에 대한 고찰 무인 알-하크 와-딘 샤루크 미르자(아랍어 ‘루흐’(“영혼”)와 페르시아어 ‘샤’(“왕”)에서 유래 –의 넷째 아들로
무인 알하크 와딘 샤흐루흐 미르자(아랍어 '루흐'[“영혼”]와 페르시아어 '샤'[“왕”]에서 유래)는 아미르 티무르의 넷째 아들이자 호라산(1397년부터), 티무르 제국(1409년부터), 이라크(1420년부터)의 통치자였습니다. 그는 저명한 천문학자 울루그베크의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그는 튀르크계 바를라스 부족 출신이었습니다.
위대한 군주 아미르 티무르의 어린 아들 샤흐루흐는 1377년 8월 20일에 태어났습니다. 샤흐루흐의 어머니는 두글라트 가문 출신의 딜샤드 아가였습니다. 아미르 티무르는 1375년에 그녀와 혼인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샤흐루흐 미르자'라는 이름은 아미르 티무르가 직접 지었다고 전해집니다. 샤흐루흐의 어머니는 1383년에 일찍 세상을 떠났고, 그는 티무르의 첫째 부인인 사라이 물크 하눔의 손에서 자랐습니다.
1394년 3월 22일, 샤흐루흐의 아들 울루그베크가 태어났습니다. 이 경사를 기리기 위해 아미르 티무르는 포위 공격 끝에 함락되었던 마르딘 시의 반란군을 사면하고, 몰수했던 물품들을 그들에게 돌려주도록 명령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히브키란은 샤흐루흐의 또 다른 아들이자 자신의 손자인 이브라힘 술탄의 탄생 역시 성대하게 축하했습니다.
그 후 아미르 티무르는 샤흐루흐 미르자를 사마르칸트의 통치자로 임명하고 즉시 수도로 보냈습니다. 이 임명은 다음 원정이 예상보다 더 오래 걸릴 것임을 암시했습니다.
1397년, 사마르칸트로 돌아온 후 아미르 티무르호라산, 시스탄, 마잔다란의 통치자 샤 루흐 미르자.
1402년 7월 28일 오전 9시, 역사상 가장 중요한 전투 중 하나인 ‘번개’ 바예지드와 사히브키란 아미르 티무르 사이의 대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샤 루흐 미르자 역시 이 전투에 참전했습니다.
부친이 사망할 당시 그는 호라산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던 중이었습니다. 이후 사히브키란은 세상을 떠나기 전, 이 지역을 샤 루흐에게 하사했습니다.
1405년 아미르 티무르가 사망한 후 내부 권력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손자 칼릴 술탄(1405-1409)이 마와란나하르의 권력을 장악했으나, 호라산에서의 여러 군사적 충돌 끝에 아미르 티무르의 막내아들 샤 루흐가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1409년 칼릴 술탄의 패배 이후 티무르 제국의 군 지휘관들은 마와란나하르의 통치권을 샤 루흐 미르자에게 넘겼습니다. 샤 루흐는 호라산에 머무르기로 결정하고 헤라트를 제국의 수도로 삼았으며, 마와란나하르 지역은 그의 아들 울루그베그(1409-1449)에게 위임되었습니다. 샤 루흐 미르자의 치세 동안 헤라트는 동방 최고의 학문과 문화의 중심지로 번영했습니다. 그의 아들 바이순구르는 이곳에 예술 아카데미를 설립했으며, 이는 훗날 위대한 거장 베흐자드를 배출하는 요람이 되었습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티무르 제국의 위력은 굳건히 유지되었습니다.
샤 루흐 미르자는 이집트, 오스만 제국, 중국에서 온 사절단을 거듭 맞이했습니다. 그가 파견한 사절단 또한 중국, 인도, 이집트, 오스만 제국을 방문했습니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오스만 제국은 이미 1444년 이전부터 아미르 티무르의 후계자로서 샤 루흐에게 조공을 바쳤습니다. 평소 호위병 없이 사원을 찾았던 샤 루흐의 목숨을 노린 암살 시도가 수차례 이어졌습니다. 샤 루흐의 정실부인 가우하르 샤드 베김은 국가 내정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1447년 샤 루흐가 서거한 후 권력은 울루그베그의 손으로 넘어갔습니다. 샤 루흐의 유해는 울루그베크는 헤라트에서 사마르칸트로 운구되어 가족 묘역인 구르 에미르에 안치되었습니다.